오랜만에 활동량이 많아지니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다.
서너 시간의 숙면 후 깼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다시 잘 수가 없었다. 낮에 잔돈 만들 목적으로 샀던 머핀을 들고 식당으로 간다.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다행히 불이 환했다) 머핀이랑 커피를 먹고서야 허기가 가시는 기분이다.


간식을 먹고는 빈둥거리다 다시 잠들었다. 새벽에 배가 고파 깨는 일이 며칠 반복되면서 내가 지금 시차 적응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라면 한창 활동할 시간이니 배가 고플만도 하다.
워싱턴은 박물관이 많기로도 유명해서 대표적인 박물관 몇 개만 둘러보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고 했다.
예전같음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박물관을 다녔겠지만 모처럼의 휴식이니 머리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백악관을 시작으로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와 근처에 있는 미국 전 대통령들 기념관을 둘러보려고 한다.
한국전 참전용사를 기리는 곳이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되면서, 미국까지 간 김에, 이왕이면 우리 나라를 위해 힘썼던 분들을 위한 곳에 가 보자 싶었다. 그런데 위치까지 딱 백악관과 기념관들 주변이다보니 오늘의 여행 테마가 정치가 되어버렸다. 미국 정치 1도 모르는데.
백악관의 경우 미리 예약하면 내부투어가 가능하다고 했다. 예약 시스템이 별도로 있지는 않고 그냥 메일로 신청하는 거라 답장이 오면 예약이 된거라고.
여행 계획을 너무 늦게 짜는 바람에 마감을 예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메일을 보냈는데 당연히 회신은 없었다.

백악관에 발도장 찍고 근처의 워싱턴 기념탑 쪽으로 넘어간다. 걸어가기에 거리가 꽤 있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정부관련 건물과 공원만 있고 버스가 다닐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냥 열심히 공원을 가로 질렀다.
관광객 외에는 인적이 드물었는데, 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낮아서 그런건지 아님 공무원들은 죄다 일하러 건물로 들어가서 그런건지 모르겠다.
지나가다가 본 재무부 (Department Of Treasury) 건물.
파르테논 신전같아서 신기해서 찍었다. (삼각 지붕에 기둥이면 무조건 파르테논 신전만 생각남;;)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동 빌딩.
건물 이름에 전대통령 이름을 붙이다니 조금 생소하고, 계속 보이는 유럽식 건물은 미국이 유럽 이민자의 나라라는 걸 새삼 느끼게 한다.


기념답이 보인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 본 적십자 건물.
흰 건물에 빨간 십자가라니 공기업 건물이 이렇게 예쁠 일인가 싶다.

그리고 The Second Division Memorial.
불타는 칼을 쥐고 있는 형상의 기념물로 미국 제2보병사단에서 전사한 군인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물이란다.

마침내 횡단보도 건너로 워싱턴 기념탑이 보인다.
예전에 읽었던 어떤 소설에서 워싱턴 기념탑을 오벨리스크라고 지칭했었다. 워싱턴 기념탑에 무지했던 나는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 있지않나, 워싱턴에 웬 오벨리스크?' 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여행 준비하면서 워싱턴 기념탑의 존재를 알았다. 영화 스파이더맨에도 나왔다고 하는데 영화를 안 봤으니 알리가.ㅎㅎ

기념탑 안에 전망대가 있다고 하지만 날씨도 흐리고 전망대에 올라갈만큼의 의욕이 있지도 않아서 패스.
제대로 찾아왔다. 표지판의 화살표를 따라 갔더니 참전군인 조형물을 찾을 수 있었다.

단순 비석이 아닌 군인 모형이라 기념비 조성할 때 비용이 꽤 들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부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현지법인에서 갹출했다고 한다.


벽면 한 쪽에는 XXX회 워싱턴 지회에서 보낸 화환들이 세워져있는데, 얼마 전에 행사가 있었어서 보낸 것인지 주기적으로 보내서 항상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또 다른 벽에는 참전군인의 모습들이 새겨져있다.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어서 생각했던 것만큼 엄숙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역사의 흔적을 외국에서 본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근처에 있던 링컨 기념관.
이 건물이야 말로 파르테논 신전을 본 뜬 것이라고 한다.

기념관 계단에서 보이는 뷰.
워싱턴 기념탑과 저 멀리 국회의사당도 보인다. 날씨만 좋았으면 뷰가 정말 예뻤을 것 같은데 아쉽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면 링컨 조각상이 있고, 좌우에 글귀들이 있는데 연설문과 대통령 취임사(일부)라고 한다.



이 근방에 전 대통령 기념관들이 밀집되어 있다. 그런데 걷기엔 멀고 버스 타기엔 버스 정류장까지 거리는 꽤 있는데 버스 타면 한 정거장 후 내려야하는 애매한 거리들이다.
다행히 주변에 공유 자전거(캐피탈 바이크 셰어) 주차장이 있어서 어떡하면 자전거를 타고 덜 걸을지 지도를 보며 동선을 연구하던 중 근처에 아인슈타인 메모리얼이 있는 걸 발견했다.
솔직히 미국 역사에 관심이 없어서 전대통령 기념관보다는 아인슈타인 메모리얼이 더 흥미로웠다. 자전거 주차장에 가깝기도 했고.
그래서 만나게된 거대 아인슈타인.

물리과목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선택과목도 물리였고 학부 전공기초 과목도 물리를 1순위로 들었다.
현대 물리 쪽으로 교양도 들었었는데 슬프게도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GG.
잘 이해하고 싶어서 당시 유행하던 상대성이론 관련 도서도 읽었었지만, 음..아인슈타인의 일대기만 기억에 남게된..애증의 현대 물리다.ㅎㅎ
아인슈타인 동상을 지나 기념관으로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응?! 데스크에 직원이 있다. 관광지가 아닌거 같은 분위기에 직원에게 구경해도 되냐고 물어보고는 신분증으로 방문자 등록을 했다.
팜플렛을 받아 살펴보는데 이 곳은 아인슈타인 메모리얼이 아니었다.
대통령 기념관을 '메모리얼'이라고 하길래 아인슈타인 메모리얼도 당연히 기념관인줄 알았건만 아인슈타인 메모리얼은 건물 앞에 있는 저 거대 동상을 가리키는 거였다.

여기는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 로 대충 찾아보니 과학아카데미라고 과학자들 학술 단체인데, 우리 나라의 공학한림원/과학기술한림원 쯤 되는거 같다.
단정하게 보이는 외관과 달리 내부는 많이 화려했다. 높은 천장과 비싸보이는 그림, 누군가의 흉상들.
관광객이 올 만한 곳이 아닌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ㅎㅎ
조용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분위기와 내가 어디까지 구경해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고 '여긴 뭐 하는데지?'라는 생각에 살짝 위축된 상태로 소심하게 다니는데
(당시에는 이 곳이 우리나라의 공학한림원/과학기술한림원에 해당한다는 걸 몰랐는데도 나같이 허접한 프레쉬 박사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거같다.)
마침 어느 방에서 세미나를 하는지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었고 어느 통로에는 포스터 논문이 전시되어 있었다.
학회에 온 것같은 익숙한 느낌에 편한 마음으로 논문을 좀 봐주고는 모르는 분야라 봐도 모르겠길래 곧 그 자리를 떠났다.
어느 구석에서 봤던 찰스 다윈이 새겨진 동문(bronze door) 사진.
다윈이라는 글자만 봐도 찰스라는 이름과 진화론이 자동으로 떠오르며 내적 친밀감이 느껴진다.
주입식교육의 위엄이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곳이었지만 나름 이리저리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더위도 피할 수 있었다.
들어올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입구에 있던 '푸코의 진자'를 나가면서 봤다.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
지금은 작동하지 않지만 2차세계대전 이전부터 이 곳에서 전시되었다고 하니, 과학아카데미의 긴 역사를 알 수있는 전시물이 아닌가 싶다.


밖으로 나왔더니 하늘이 맑다. 하루 종일 구름낀 하늘이었는데.
시원한 실내에서 체력을 비축했으니 부지런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제퍼슨 기념관으로 갔다.
공유 자전거 주차장 위주로 움직이다보니 항상 뒷문으로 들어간다.
제퍼슨 기념관.


토머스 제퍼슨 동상.

기념관을 등지고 보이는 포토맥강 너머 워싱턴 기념탑.

그냥 발도장 찍으러 온 거라 사진만 몇 장찍고 돌아간다.
주변에 루즈벨트, 마틴 루터 킹 기념관도 있지만 이미 지치고 흥미도 없어서 이것도 패스했다.
오후 1시 쯤이었는데 한국시간으로 새벽 3시다보니 거의 좀비상태다.
숙소로 돌아가서 점심 먹고 쉬려고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지하철 역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홀로코스트 기념관.

'여기까지 왔는데' '우연히 딱 마주쳤는데 어떻게 안가'가 발동해 들어갔다가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의욕과 다르게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기념관 초입에서 다시 나왔다.
날씨가 꾸물꾸물한게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기는 했지만 가방이 무거운게 싫어서 우산을 안 챙겼다.
비가 와 봤자 얼마나 오겠나며 방심한 것이다.
오전 동안 하늘이 흐렸다 맑았다를 반복했기 때문에 비가 곧 멈출 줄 알고 밖으로 나온건데 빗방울은 빗줄기가 되었고 빗줄기는 갈수록 강해졌다.
조금만 더 가면 지하철 역인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길거리에 있는 작은 매점의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기로 한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가지말고 바로 숙소로 갈 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한 2~30분 기다려도 비가 멈출 것 같지 않아서 그냥 비를 맞고 돌아가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고보니 비오는 날에 우산 없이 뛰지도 않고 걸어본 건 처음이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쫄딱 젖어서 지하철 빈 자리에도 앉을 수 없었지만 낯선 곳에서의 소소한 일탈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하고나니 오후 4시가 넘었다.
숙소 옆에 있는 Bolt Burger에서 늦은 점심을 사와서 먹는데 피곤해서 그런가 햄버거에서 맛이 안 느껴진다.


오늘은 워싱턴 마지막 날로 완전히 내 맘대로 보낸 하루다.
시차 때문에 헤롱대느라 정신은 좀 없었지만 번잡하지않고 조용한 도시라 마음에 들었다.
다음에 또 올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때는 박물관 투어도 좀 해야지.
피곤하기도 하고 내일 아침 일찍 뉴욕가는 버스를 타야해서 초저녁이지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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